211124 잡설

圍離庫 2021. 11. 24. 04:44

  한때 블로그 서비스를 지원하는 곳에는 모두 블로그를 개설한 적이 있었다. 네이버, 다음, 이글루스 등 지금까지 살아 있는 공간을 비롯해 미디어몹이나 엠파스 처럼 사라진 곳까지 참 다양하게도 개설했다. 블로그라는 명칭을 공유하진 않지만 유사한 시스템을 제공했던 각종 개인sns 서비스(멀게는 싸이월드 미니홈피는 물론 각종 온라인 서점이나 언론사의 개인 공간 등)를 모두 세어본다면 수가 꽤 될것이다. 본진은 네이버 블로그였지만 각자 본진으로 삼고 있는 곳들이 다르다보니 처음엔 그들과의 소통 창구로 시작했던 것이었다. 그러다 나도 욕심이 생겨서 '그래, 메타블로그를 한번 만들어 보자!'라는 부푼 꿈을 않고 이런저런 포스팅을 늘려갔다. 하지만 이 욕심은 능력 - 글을 중심으로 하는 컨텐츠를 생산하기에 나는 너무 느렸고 게을렀다. - 을 생각하지 않은 능력이었고, 블로그 기능 자체의 퇴조로 인해 점차 사라지고 포기하는 곳이 생기게 되었다. 2021년 현재 남아있는 공간 가운데 제기능을 하는 곳은 본진인 네이버 블로그가 유일하며 티스토리 블로그는 종종 생존신고나 하는 공간으로 남아버렸다.(그래도 가장 늦게 개설한 티스토리 블로그 - 그것은 나의 선호도가 문제가 아니라 초대장이라는 시스템을 고수하고 있었던 티스토리 블로그의 시스템 때문이었다. - 가 이렇게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 신기하긴 하다.)

 

  이제와서 생각하니 참 부질없는 짓을 많이 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공간(티스토리, 바로 이 블로그)의 시작을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다시 힘을 내볼까? 어떻게 할 수나 있을까? 모를 일이다. 한숨과 쓴 웃음이 길게 나는 것은 비단 시간이 이렇게 흘러가서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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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서총설 (2) 『맹자』 읽기

 

  『맹자(孟子)』라는 서물은 난해한 책이다. 기본적으로 문장이 길다. 맹자(孟子)의 그 화려한(?) 언설(言說)이 고스란히 담겨있기에 그렇다. 그러면서도 대화의 생동감도 겸비하고 있는 텍스트이기도 하다. 그 특유의 생동감과 긴 호흡을 한꺼번에 살려가면서 읽기란 매우 어렵다. 이것이 『맹자』가 난해한 이유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괜히 '문리(文理)'를 트이게 하겠다고 이 책을 읽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동시에 『맹자』라는 서물의 난해함을 배가시키는 것은 개념화 된 어떠한 언어들이 등장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논어(論語)』에서 광범위하고 거칠게 제기되었던 키워드보다 더 많은 수의 키워드가 등장하고, 역시 선진시대의 그것답게 이것을 하나의 의미로 파악해 가기는 상당히 어렵기 때문이다.[각주:1]

 

  『맹자』라는 텍스트의 위상이 경전의 위치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은 흔히 남송(南宋)의 주희(朱熹, 1130~1200)의 공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이전인 북송(北宋) 시대부터 십삼경(十三經)의 하나로 수록되었다는 점, 최초의 주석작업이 후한(後漢) 시대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미 후한 시대를 기점으로 중요 텍스트 중 하나로 인지되었다고 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각주:2] 물론 맹자라는 사상가의 위치를 공자의 다음가는 위치로 자리매김 시킨 것은 여지없이 주희의 공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이 텍스트의 중요성 자체는 늦어도 후한시대에 이미 준 경전적인 위치에 있어왔다고 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 내가 견지하고 있는 『맹자』 이해의 틀은 『논어』 이해의 틀과 동일하다. 그만큼 난해한 키워드를 어떻게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것인가는 이 텍스트를 독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장이라는 측면에서 주희의 해석은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결국 이 점은 훈고학의 성과를 참조할 수 밖에 없다. 그에 앞서 독자들에게 당부(?)해야 할 것은 그것이다. 훈고학의 해석이 주희의 해석과 완전한 별개의 그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점이다. 결국 주희의 훈고는 상당부분 한~당 시대의 훈고학에 빚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작업은 두 텍스트를 대립적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하나의 흐름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관점 하에서 진행될 것이다.

  

  2020년 현재 주로 참조하고 있는 『맹자』 독해의 보조자료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전근대 주석 : 『맹자집주대전』, 『맹자주소』, 『맹자정의』

  2. 현대 주석 및 번역 : 『맹자역주』(양백준)

  3. 한국어 번역본 : 『맹자집주 부 안설』(성백효), 『맹자주소』(최채기, 양기정, 간행중)

  4. 연구서 : 『맨 얼굴의 맹자』(퀑로이슈운, 이장희 역), 『맹자의 땀, 성왕의 피』(김상준)

 

  덧) 기타 사료는 『논어』와 같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였다.

  1. 이러한 지점은 『논어』가 갖는 텍스트로서의 위치를 계승한 것으로서 『맹자』를 바라보게 되는 원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맹자』와 함께 이러한 지점을 공유하는 것이 바로 『순자(荀子)』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때문에 통시적인 관점에서 『맹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맹자』와 『논어』, 그리고 『순자』를 함께 교차적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본문으로]
  2. 중국 사상사에 있어서 텍스트에 대한 주석작업은 단순히 텍스트의 내용을 해석하는 작업에서 끝나지 않는다. 해당 텍스트의 편차를 정하고, 오탈자를 살펴서 최초의 교감결과를 내놓는 텍스트 비평의 과정이기도 하다. 유가 내에서 『맹자』에 대응하는 또 다른 서적인 『순자』는 시기적으로 당(唐)나라 때 최초의 주석 작업이 이루어졌다. 단순히 시기적인 측면에서만 비교할 것은 아니겠으나, 그만큼 텍스트 정립의 필요성이 늦게 대두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대화체를 위주로 하고 있는 『맹자』와는 달리 『순자』는 보다 더 정제된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텍스트 자체의 와전이 적었기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고, 분서갱유(焚書坑儒)의 설계자라는 이사(李斯)가 순자의 문하였음도 어느정도 감안되어야 하겠지만, 그 만큼이나 중요도의 차이 역시 존재하였다고 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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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

圍離庫 2020. 4. 5. 05:04

  옛날 이야기.

  

  그저 높은 꿈, 그것만이면 이룰 수 없을 것이 없으리라 여겼던 그때의 이야기가 문득 생각났다. 참 이렇게도 얼치기가 있을까? 나에게 이룰 수 있는 것이란 없다. 그것을 이미 안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내고 싶어도 그럴 용기가 없으므로 기렇게 한해 한해, 덤과 같은 목숨을 연명해 간다. 내 꿈은 이미 닿을 수 없이 멀어졌고, 나는 한껏 뒤쳐졌다. 앞으로 달려갈 기운이 또 남아 있을까? 글세, 아닌 것 같다. 몸부림치며 이루고자 했던 꿈이란 허망한 일이 되었다. 무엇이 나에게 남았는가? 꿈? 사랑? 쥐꼬리만한 의무감? 우스운 사명감?

 

  아무것도 남은게 없다.

 

  알량한 자존심도 남은 것이 없다. 그저 이제는 뒤쳐진 채, 더 나아갈 수 없는 삶을 부지하고 있을 뿐.

 

  오직 나는 죽어가기 위해 살아간다. 

  딱히 삶에 애착이 있어서라기보다 그저 죽음에 엄습해 올 고통이 두려울 뿐이다. 나의 어머니, 이 보잘것 없고 부실한 아들에 의지하는 나의 원천이 안스러워 살아 남아 있을 뿐이다. 이미 장래란 보이지 않는데 내가 무슨 장래를 보고 더 애착을 가질 수 있겠나? 그러할 뿐인 것을.

 

  머리가 아프다.

  깨질듯 머리가 아파.

 

  어서 죽었으면- 내 스스로 고통을 감내할 자신이 없어 끊어내지 못한 것.

  나를 둘러싸고 나를 얽맨 모든 것들 다 나보다 앞서 가버리고

  나도 그 구애에 벗어나 마침내 그저 피안의 어느 곳으로 갈 수 있으면.

Posted by 蝟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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