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국립국악원에서 있었던 한 발표회는 대사건으로 평가된다. 사람이, 무려 300분[각주:1], 5시간에 걸쳐 '창극'도 아닌 홀로 독창으로, 판소리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사건이 퍽 센세이션하긴 했던 듯 하다. 오죽하면, 이후 판소리 약사를 서술하는 글에서 태반이 이것을 '최초의 완창'으로 꼽을 정도니 말이다.[각주:2] 엄밀히 말하면 이 공연은 '완창'이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한 공연-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각주:3] 여하간, 이 때의 공연으로 공연자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가 바로 불세출의 광대 '박동진'이다. 그 이후로 박동진은 춘향가, 적벽가, 심청가, 수궁가의 4바탕을 차례로 완창했고, 그 사이사이 그리고 그 이후까지 실전된 7가 가운데 6바탕을 포함한 많은 수의 판소리 발표회를 가졌고, 1976년, 적벽가의 완창 능력을 인정 받아 조학진 제 적벽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대중들에게는 '흥보가'의 명창으로 이름이 높았고, 그것은 90년대 초, 우황청심원 광고 직접 출연해 부른 '제비 몰러 나가는 대목'으로 인해 더욱 짙어진 듯 하다. 여하간- 70~90년대까지 왕성한 활동을 보였던 박동진은 활동량에 비해 많은 갯수의 음반을 발표하지는 않았다.

  이 사설은 몇 안되는 그의 완창 음반 가운데, 1988년 녹음해 SKC에서 출반한 '박동진 판소리 대전집'의 흥보가 녹음을 토대로 채보한 것이다. 70년대 후반부터 그의 지정고수로 활동하였던 주봉신이다.


【아니리】

  이건 흥부가였다. 아 동방이 군자지국이요 예의지방이라 십실지읍에도 충신이 나고 칠세지아도 효제를 일삼으니 어이 불량한 사람이 있으리오마는 요순 시절에도 사흉이 났었고 공자님 당년에도 도척이가 생겼으니 아마도 일종여기를 마음대로 못하든 것이었다. 전라도는 운봉이고 경상도는 함양이라. 중년에 운봉 함양 두 얼품에 형제가 사는디 형은 놀보고 아우는 흥보렸다. 사람사람이 오장이 육부인디 놀보는 오장이 칠보요. 어째서 칠보냐 할 것 같을 지경이며는 심술보 하나가 왼편 갈비 밑에 노인들 담배 주머니 매달리듯 딱 매달려갖고 이놈이 밥만 먹으며는 심술을 부리는디 이놈의 심술이 일망무제로 나오던 것이었다.


【자진모리】

  놀보 심술 볼작시면 대장군방 벌목하야 대장군방 벌목하고 오구방에 이사권고 삼살방에 집짓고 새초분에다 불붙이고 제불할제 뼈감추고 불난데 부채질 소대상에다 체청치고 야장할제 외장처 혼대사에 싸개 치고 다된 혼인은 파의치고 장에 가면 억매흥정 외상술값 억지써 미나리꽝에 소몰아 넣고 고추밭에 말달려 애동호박에 말뚝밖고 늙은 호박에 똥칠하고 똥누는 놈은 주저앉혀 우는 어린에 똥먹이고 새암질에 허공파 애밴 부인네 배통차고 술잔 든놈 멱살잡고 봉사보며는 인도하야 개천 물에다가 밀어 넣고 길가는 과객 양반 재울듯기 붙들었다 해지면 내쫓고 옹기장사 작대 차고 닫는놈 다리 걸고 이앓는 놈 뺨쌔리고 배앓는 놈 간지리고 못자리에다 돌던지고 차담상에 흙퍼붓고 제줏병에 개똥넣고 소주병에다 오줌싸고 새망건 편자끊고 새갓보면 철대 떼고 마른신 운두 끊고 짚신 보면은 앞총 끊고 앉은 뱅이는 택견해 곱사등이는 되집어놓고 다듬이 돌로 눌러 놓고 절름발이 딴죽쳐 수절과부 무함하고 중보며는 목탁 뺏고 이웃집 노인네 잠 곤히 들었을 제 가만가만히 들어가 가만가만히 들어가 훌떡 벗어진 이마빡을 대꼭지로 탁 썌리고 먼산 보고 웃고


【도섭】

  이놈의 심술이 이러허니 삼강을 아느냐 오륜을 아느냐 굳기가 돌덩이 갖고 모지기가 짝이 없고 욕심이 족제비고 


【아니리】

네모난 송곳으로 놀보 이마빡을 콱 쑤셔가꼬 홱홱 내둘러도 짓물 한방울 안날 이 천하의 놀보놈이렸다.

 


◆ 주석 Rreference.

  1. 박동진의 이 완창 공연 당시 현장의 사진 가운데에는 뒤 현수막에 '300분'으로 기록된 것이 있다. [본문으로]
  2. 그러나, 판소리 최초의 완창 발표회는 1956년 4월 28일, 당대 최고의 명창이었던 임방울의 적벽가 공연이었다. 이 공연은 운니동 국립국악원의 일소당(佾韶堂)에서 개최되었다.(국립국악원은 종로구 운니동에 있었던 구왕실아악부 - 일제시대 당시 이왕직악악부 - 를 모태로 설립되었기 때문에, 창설 초기에는 운니동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랬던 것이 장충동으로 이전되었다가, 1987년 현재의 서초동으로 이전한 것이다.) 당시 고수는 조선성악연구회 시절부터 활약했던 김세준(金世俊)이었다. 이후 임방울은 같은 해 11월 26일 국립국악원 연주실(역시 운니동이었던 듯 하나, 정확히 어떤 건물이었는지는 아 수 없다. 추후 보강함.)에서 역시 김세준의 북에 맞추어 수궁가를 완창했고, 이듬해인 1957년에는 8월과 9월에 적벽가를 완창했다.(8월의 고수는 김재선, 9월의 고수는 김재선이라는 기록도 있고, 김세준이라는 기록도 있다.) 이 공연들은 완창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어니었지만, 판소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하루에 모두 공연한 것으로는 처음의 일이었다. [본문으로]
  3. 사유는 주2 참조. [본문으로]
Posted by 蝟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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